오늘은 새벽 5시도 되기 전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벌써 동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이 조금씩 걷히면서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 밖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달려야 할 거리는 10km.
삼성헬스 러닝코치 Level 5의 마지막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달리는 도중 문득 이상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더 멀리 달리는 능력일까?
더 빠르게 달리는 능력일까?
아니면 지금 나는 나만의 톱니바퀴 하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달리기 시작한 뒤 저는 거리와 페이스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5km 다음에는 10km가 있었고, 10km 다음에는 15km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프마라톤과 풀마라톤도 달려보고 싶습니다.
페이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오래.
하지만 오늘 10km를 달리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쩌면 러닝에서 먼저 만들어야 하는 것은 거리도 기록도 아니라,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나만의 러닝 리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0km를 달리며 떠올린 ‘나만의 톱니바퀴’
톱니바퀴를 하나 떠올려 봤습니다.
톱니 하나하나가 엉성하다면 처음 몇 바퀴는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속도가 빨라지고 오랫동안 돌아가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조금만 균형이 어긋나도 흔들리고, 다른 톱니와 맞지 않으면 마찰이 커지고, 결국 제대로 굴러가지 못합니다.
러닝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동안 달리면서 호흡, 피치, 착지, 팔의 움직임, 자세, 체력, 심박수, RPE 같은 것들을 하나씩 경험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각각 별개의 문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들이 하나의 톱니바퀴를 구성하는 요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 톱니 | 러닝에서의 의미 |
|---|---|
| 호흡 | 현재 강도를 몸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
| 피치·리듬 | 움직임을 얼마나 자연스럽고 반복 가능하게 이어가는가 |
| 자세 | 거리가 길어져도 움직임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하는가 |
| 체력 | 현재의 움직임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 |
| 기술 | 반복되는 달리기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는가 |
| 도전 | 현재 능력보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나를 이끄는 목표 |
이 중 하나만 크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 만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달리고, 쉬고, 다시 달리고, 조금 익숙해지면 새로운 자극을 주고, 다시 적응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톱니의 모양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달리기 → 적응 → 조금 더 편안해짐 → 새로운 도전 → 다시 적응 → 더 단단한 러닝
핵심 정리: 더 멀리 달리는 것과 더 빨리 달리는 것은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호흡과 리듬, 체력과 자세가 반복을 통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황영조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달리기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감독의 러닝 콘텐츠를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에서는 친근하게 ‘영조형’이라는 이름으로 러닝 경험과 노하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러닝 조언에서 제가 특히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기록과 속도에 매달리기보다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몸과 리듬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입니다.
황영조 감독의 러닝 자세 코칭을 정리한 자료에서도 자신의 몸 상태에 따라 주법이 달라질 수 있고, 자신에게 편안한 페이스로 달리며, 장거리일수록 편안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이 소개됩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러닝보다 즐길 수 있는 러닝, 무리한 페이스보다 편안한 페이스, 그리고 장거리일수록 더욱 편안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황영조 감독은 다른 인터뷰에서도 아마추어 러너는 프로 선수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달리면서 지나치게 무리하지 말 것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최근 서브3 훈련 관련 콘텐츠에서도 비슷한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황영조 감독의 해당 발언을 소개한 러닝 자료에서는 기록은 결국 자신의 만족이지만, 지나치게 무리하다 부상으로 달리기를 그만두는 경우를 경계하는 내용이 함께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달리기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숫자를 바라봅니다.
5km, 10km, 하프, 풀마라톤.
7분 페이스, 6분 페이스, 5분 페이스.
하지만 숫자를 향해 몸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과 그 숫자를 감당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정일 수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톱니바퀴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핵심 정리: 목표 기록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목표 기록보다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은 그 기록을 감당하면서도 계속 달릴 수 있는 몸과 리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Flow’와 닮아 있었습니다
오늘 달리면서 떠올린 톱니바퀴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Flow 이론이 떠올랐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칙센트미하이가 러닝 저널리스트이자 코치인 Philip Latter, 심리학자 Christine Weinkauff Duranso와 함께 아예 러닝에 Flow를 적용한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Mihaly Csikszentmihalyi · Philip Latter · Christine Weinkauff Duranso
Human Kinetics, 2017
『Running Flow』는 훈련과 경기에서 러너가 Flow 상태를 경험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입니다. 심리적 장벽 역시 러닝에서 신체적 장벽만큼 어려울 수 있으며, Flow를 단순한 경기력 향상뿐 아니라 더 건강하고 즐거운 러닝 경험과 연결합니다.
책의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Flow의 경험과 구성요소를 설명한 뒤 일상적인 러닝에서의 Flow, 경기에서의 Flow, 심지어 Flow의 한계와 러닝을 넘어선 Flow까지 다룹니다.
그중 오늘 제 생각과 가장 맞닿아 있었던 것은 Challenge-Skills Balance, 즉 도전과 능력의 균형입니다.
『Running Flow』를 소개하는 Human Kinetics 자료에서도 Flow를 경험하려면 현재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노력이 필요한 도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현재의 몸과 마음 상태에 따라 적절한 도전 수준도 계속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도전이 능력보다 너무 크면 → 압박과 불안이 커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 도전보다 훨씬 크면 →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성장하는 만큼 적절한 새로운 도전이 주어질 때 → Flow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것을 러닝에 대입하면 제가 경험하고 있는 과정과 꽤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5km가 도전입니다.
반복해서 달리다 보면 5km를 감당할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면 10km라는 새로운 도전이 등장합니다.
10km가 익숙해지면 15km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거리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10km를 이전보다 편안하게 달리는 것도 성장입니다.
같은 페이스에서 RPE가 낮아질 수도 있고, 심박이 안정될 수도 있고, 후반 자세가 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톱니바퀴가 조금 더 정교해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핵심 정리: Flow의 관점에서 러닝의 핵심은 무조건 어려운 목표가 아닙니다. 현재의 능력과 적절하게 맞물리는 도전을 찾고, 능력이 성장하면 다시 도전 수준을 조절하는 과정입니다.
꾸준함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톱니를 다듬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흔히 러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꾸준함입니다.
그런데 ‘꾸준히 달린다’는 말을 단순히 매일 같은 거리를 같은 속도로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조금 재미가 없어집니다.
저는 오늘 조금 다르게 생각해봤습니다.
꾸준함은 반복 자체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내 톱니를 조금씩 수정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10km에서 숨이 찼다면 다음에는 호흡을 관찰합니다.
후반 자세가 무너졌다면 처음부터 조금 편안하게 달려봅니다.
보폭이 너무 커서 착지가 불안하다면 리듬을 다시 살펴봅니다.
10km가 편안해졌다면 조금 더 긴 거리를 경험합니다.
거리는 충분하지만 속도가 부족하다면 몸이 준비된 이후 새로운 속도 자극을 추가합니다.
그리고 다시 Easy Run으로 돌아와 몸이 그 자극을 흡수할 시간을 줍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깅, Long Run, Tempo, Interval, Hill Training 같은 운동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다른 톱니를 다듬는 도구가 됩니다.
| 훈련 | 다듬고 싶은 부분 |
|---|---|
| Easy Run | 편안한 리듬과 유산소 기반 |
| Long Run |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는 지속능력 |
| Tempo | 조금 힘든 속도를 통제하며 유지하는 능력 |
| Interval | 빠른 리듬과 높은 강도에 대한 적응 |
| Hill | 추진력과 러닝 근력, 움직임 |
| Recovery | 다듬은 톱니가 몸에 자리 잡을 시간 |
그리고 이것들이 어느 순간 잘 맞물리기 시작하면 이전과 같은 페이스인데도 달리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억지로 앞으로 끌고 가는 느낌보다 몸이 리듬을 타면서 자연스럽게 굴러가는 느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러닝에서 찾는 Flow도 이런 순간과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핵심 정리: 꾸준함의 의미를 단순한 반복 횟수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반복하고 관찰하고 조정하면서 내 몸에 맞는 러닝을 만들어가는 것 역시 꾸준함입니다.
가장 즐거운 곳은 결승선이 아니라 달리고 있는 지금이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10km를 달리면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입니다.
우리는 달리면서 계속 결승선을 바라봅니다.
5km를 완주하면 10km.
10km 다음에는 하프.
하프 다음에는 풀마라톤.
6분 페이스를 달성하면 5분 40초, 그다음에는 또 다른 기록.
목표가 있다는 것은 좋습니다.
저 역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오늘 새벽에도 밖으로 나가 10km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목표만 바라보다 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마라톤을 4시간 동안 달린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기쁨은 아주 강렬하겠지만 그 순간은 짧습니다.
반면 그곳까지 가는 과정은 몇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러닝에서 가장 즐거운 장소는 어디여야 할까요?
달리고 있는 지금을 즐길 수 있는 러너가 되고 싶습니다.
이 생각은 『Running Flow』가 이야기하는 Flow의 한 특징과도 만납니다.
Flow에서는 활동의 외부 결과만이 아니라 그 활동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 경험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Running Flow』 역시 더 나은 경기력뿐 아니라 더 건강하고 즐거운 러닝 경험으로 Flow의 의미를 확장합니다.
그래서 완주 메달도 좋고 PB도 좋지만, 그것만이 러닝의 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순간.
호흡이 어느 순간 리듬에 맞아 들어가는 순간.
예전에는 힘들었던 거리가 오늘은 조금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
잡생각이 사라지고 지금 한 걸음에 집중하는 순간.
그 순간들도 이미 러닝의 보상입니다.
그렇다고 Flow를 만능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Running Flow』에는 아예 Flow's Limitations라는 장이 있습니다. Flow는 언제나 나타나는 상태도 아니며 모든 러닝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도 아니라는 점까지 다룹니다.
그래서 몸이 보내는 피로와 통증을 무시하면서 “몰입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Flow와도 다릅니다.
어떤 날은 잘 굴러갑니다.
어떤 날은 무겁습니다.
어떤 날은 페이스가 좋아지고, 어떤 날은 평소보다 느립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 몸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그것도 러닝의 일부입니다.
핵심 정리: 목표는 러닝의 방향을 만들어주지만 즐거움을 미래의 결승선에만 미뤄둘 필요는 없습니다. 달리는 과정 자체가 보상이 되기 시작하면 러닝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나만의 톱니바퀴를 만들고 있다
오늘 Level 5의 마지막 10km를 달렸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리가 늘어나면 또 새로운 어려움이 생길 것이고,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을 겁니다.
페이스가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잘 달리지 못한 날도 톱니 하나를 다듬은 날일 수 있습니다.
호흡을 배운 날.
힘을 빼는 법을 배운 날.
내게 맞는 리듬을 발견한 날.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 날.
조금 더 오래 달릴 수 있게 된 날.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고 있는 순간이 즐겁다는 것을 발견한 날.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진 톱니들이 맞물리면 지금은 10km에서 돌아가는 이 작은 톱니바퀴가 언젠가는 15km, 하프마라톤을 지나 30km에서도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42.195km를 달리는 날이 온다면 저는 단순히 결승선을 통과하는 러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도전과 능력이 맞고,
한 걸음과 다음 한 걸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오랫동안 잘 굴러가는 러너.
아마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은 그런 톱니바퀴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러닝에서의 성장은 톱니바퀴를 더 빨리 돌리는 것보다 먼저 제대로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새벽의 10km도 그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러닝이 기다려집니다.
『Running Flow』
Mihaly Csikszentmihalyi · Philip Latter · Christine Weinkauff Duranso / Human Kinetics / 2017
Flow의 구성요소, 일상 러닝과 경기에서의 Flow, Flow의 한계 등을 다룬 러닝 심리학 서적입니다.
Human Kinetics – Running Flow
도전과 능력의 균형, 명확한 목표 등 러닝에서 Flow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을 이해할 때 참고할 수 있습니다.
황영조 감독 러닝 코칭 관련 자료
아마추어 러너의 편안한 페이스, 장거리 접근법, 무리하지 않는 러닝에 관한 황영조 감독의 최근 콘텐츠를 확인할 때 참고했습니다.
